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사블랑카 회담 (문단 편집) === 그 외 === * 소련 측이 요구한 유럽 내 제2전선 문제도 논의되었다. 미국이 곧바로 [[도버 해협]]을 건너 프랑스 북부에 상륙 작전을 실시할 것을 선호한 반면, 영국은 [[시칠리아]]와 [[이탈리아 반도]]에 먼저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독일군의 세력을 분산시킬 것을 주장했다. 계속된 논의 끝에 결국은 영국의 주장이 채택되었다. [[시칠리아 전투|시칠리아 침공]]이 북아프리카 전선이 완전히 정리되는 대로 실시되기로 계획된다. * 유럽 전선에서 영국의 입장이 대폭 수용된 대가로 영국은 미국에게 [[태평양 전쟁|태평양 전선]]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. 그러나 실질적으로 영국 함대가 태평양에 돌아온건 1944년 말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. 그 이전에는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해공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으니 그럴 여유도 없었다. * 북아프리카 일대의 전후 독립에 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 도출된 결과물은 없었다. 그리고 식민지를 포기할 마음이 없던 프랑스의 강경책으로 인하여 전후 북아프리카 일대는 [[알제리 전쟁|아수라장]]이 된다. * 이후 [[국민혁명군]] 참모장 겸 중국 주둔 미군의 총사령관이 된 [[앨버트 웨드마이어]]가 준장 시절에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가했다. [[분류:1943년/사건사고]][[분류:제2차 세계 대전/회담]][분류:FDR 행정부]][[분류:윈스턴 처칠]][[분류:샤를 드골]][[분류:모로코의 역사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